사이렌의 침묵
Das Schweigen der Sirenen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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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그 새벽의 이스트 월사이드는 여느 날과 다를 것도 없이 평범했습니다. 환풍 설비가 내는 소음을 배경으로 삼아 하루살이처럼 연명하는 곤궁한 생명들의 도피처. 이스트 월사이드란 그런 곳이었고, 그 안의 우리 또한 그런 패배의 표상들인 까닭에.
그러나 그렇게 여상스런 새벽에 작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환풍 설비 최상단의 배기구로는 대개 공기만이 드나들기 마련입니다. 아주 간혹, 목숨을 걸고 환풍 설비를 타고 올라 몇 겹이나 되는 배기구의 팬을 통과해서는 지상으로 나가는 괴짜들 또한 있기야 했습니다만,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였을 뿐더러 생사 또한 영영 모르게 되었으니까요. 그 새벽에 일어난 일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기묘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시체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돔 바깥으로부터.
시키거나 강제한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를 포함한 이스트 월사이드 주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침 일찍 이스트 월사이드 한복판의 공터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이들 중 그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사람일까요? 그럴 리가요.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스트 월사이드의 비참을 견디면서도 이 돔 안에 몸 붙이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가요?
한동안의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나이든 ‘닥터’였습니다. 월사이드의 선주민으로, 본래는 간호사였다지만 그나마의 지식으로 의사 노릇을 하던 여자. 그가 비명처럼 외쳤습니다. “햇볕에 탄 자국이 있어!” 선주민들 가운데 지상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들이 순식간에 동요했습니다. 다른 이가 그 말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돔의 인공 태양광으로는 피부가 그을리지 않으므로, 망자의 피부에 남은 자국은 그가 지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선언이었습니다. 추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음에도 그는 멀쩡한 옷을 입고 있었고, 오염과 재해에 그대로 노출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이스트 월사이드에서 굶주리는 우리보다도 더 나은 삶을 살아온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퍼시픽 돔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상식, 지상이 이곳 지하와 달리 죽음의 땅이라는 그 대전제가 흔들린 순간으로부터 불과 몇 주만에, 의심과 불안이 이스트 월사이드를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떤 가능성 또한 조심스레 머리를 들기 시작했지요. 무엇이라도 해 보면 안 될까 하는, 그다지 확신은 없는.
그렇게 해서 스물, 혹은 서른 남짓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지금과 같은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을수도 있겠습니다. 혹 누군가는 이곳이 ‘돔’의 체제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마다의 이유로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는 이 퍼시픽 돔 내부를 탐색하며 우리의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로 했습니다. 이스트 월사이드 바깥에서는 이것을 알고 있는지, 사이렌과 PASS는 어떠한지, 왜 우리의 의심과 불안을 그대로 놔둬 주는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느슨하기 짝이 없는 이 모임의 네 가지 규칙에 대해 우리는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거나 도망칠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 사람만 움직일 것, 단독행동은 하지 않을 것, 유사시 우리 중 누구라도 자기보호를 우선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할 것, 무엇보다도 ‘살아남을 것’. 그리하여 처음 행동을 개시할 날짜가 마침내 추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