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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의 침묵

Das  Schweigen der Sirenen

<입주신고 명단>

일리_인장.png

선주민

< Illi >

나이

키 / 몸무게

분류

참여동기

48세

176cm / 60kg

선주민

“우린 같은 장소로 돌아가야 해.”

“ 내가 이럴 줄 알았지. ”

[외형]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과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거기에 더해 오른쪽 어금니가 덧나 있어 심술궂은 상이다. 검다시피 짙은 벽안에 오렌지색 홍채가 불길처럼 퍼져 있다. 오랜 세월 지팡이를 짚어 오른쪽 어깨가 더 높은 비스듬한 채로 자세가 굳었다. 테가 찌그러진 안경은 작은 글씨를 봐야 할 때나 외투 안주머니에서 꺼내 쓴다.

[성격]

냉소적인 | "이럴 줄 알았다고."

이 모든 상황이 남의 일인 것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팔짱 끼고 방관하는 역을 자처한다. 이래라저래라 말을 얹는 건 아닌데, 온 얼굴로 표출되는 불만을 다스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걸은 입이 무겁지라도 않았다면 진작 이스트 월사이드에서도 쫓겨났을 거라고. 물론 날 때부터 이런 비뚤어진 성격은 아니었다. 아마도.

 

비관적인 | "다 끝장난 거야."

언제나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한다. 제 의견대로 하지 않았다가 일이 잘못되면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불평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어서 듣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하기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크게 실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안 그래도 일이 안 풀리는데 옆에서 구시렁대며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무기력한? | "그쪽들이 알아서 해. 사람이 말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인제 와서."

하는 말마다 퉁명스럽고 삶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닳아있지만 전부 포기한 건 아니다. 그저 있는 힘을 다해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상이 멈춰버리는 바람에 번아웃이 온 것일 뿐. 무력감과 우울함에 빠져 있지만 정말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외면하지 못한다. 일단 한번 시작한 건 책임감을 가지고 끝장을 보는 성미.

[기타사항]

돌팔이 | "꼬우면 딴 데 알아봐."

이스트 월사이드에서 의사 노릇을 하면서 받는 성의로 근근이 먹고 산다. 젊은 시절에는 흉부외과 의사였다고 하는데 나이가 맞지 않는다. 그가 18세일 때 인류의 운명이 뒤집혔고, 21세일 때 돔이 완성되어 이주민을 받기 시작했는데 의사가 되기에는 너무 어릴 때였다. 비록 불법 이주가 성행하던 끝물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즈음에는 돔 바깥에 의사 자격을 줄 기관이 남아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돌팔이라는 얘긴데... 솜씨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걸 봐선 사기꾼인가 싶다.

 

허약체 | "그런 눈으로 볼 거면 술이라도 주고 보던가."

자칭 의사라는 본인의 건강도 온전하진 않다. 추위를 많이 타고 간간이 손을 떠는 건 기본. 성대 결절을 치료하지 못한 채 방치해 목소리가 상하고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온다. 학생 때 깨졌던 오른쪽 무릎은 수술 후 제대로 쉬지 않아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지팡이가 없으면 거의 걷지 못한다. 이름이나 일정 따위도 쉽게 잊어버린다. 이런 꼴로 술을 끼고 사는데 지금까지 산 거 보면 명줄이 더럽게 끈질긴 편이다.

 

불법이주 | "거기엔 아무도 없었어."

퍼시픽 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이주 자격에서 제외됐다. 설계가 막바지에 접어들 즈음 치매에 걸렸고, 모아둔 돈은 없었기 때문. 어머니를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던 건지, 돔 안으로 이주할 능력이 없었던 건지는 몰라도 그는 고집스럽게 바깥에서 생활했으나 결국 양친을 모두 잃은 뒤에는 돌아와야 했다. 겨우겨우 돔 안으로 들어왔으면 앞으로 먹고살 일을 고민해야 하는데, 이미 지난 일들을 들먹이며 과거의 부산물이나 주워 먹고 산다.

 

회귀 | "같은 장소로 돌아가면 알 수 있어."

예를 들면 사진전 <회귀 Regression>에 대한 얘기는 마치 자신이 작가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떠든다. 이 사진전은 아마존, 빙하 지역, 대보초처럼 지구 생태계의 지표가 되는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촬영해 온난화를 시각화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나이가 많은 선주민 중에선 방송 송신이 가능한 지역에서 살았거나 도심의 전광판을 지나친 적이 있다면 빙하의 후퇴를 타임랩스 기법으로 수개월 간 촬영한 공익 광고를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섬Serm | "자고 있을 거야. 깨우지 마."

사랑하는 섬. 약도 없는 병을 앓고 있어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꼼짝 않고 누워있다는데 아무도 그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과거에는 과격파라고 불릴 정도로 활동적인 환경운동가로 유명했다고 한다. 유엔 환경 계획 단체 임원의 일원으로 시위 현장은 물론이고 간혹 뉴스에서도 그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나. 아무런 장식도 없고 얼룩덜룩 변색한 얇은 은팔찌는 섬에게 받은 선물이라면서 항상 몸에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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